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오르크 폰 퀴힐러 (문단 편집) === [[전간기]] === 종전 후인 1919년부터 퀴힐러는 [[자유군단]]에 가입해 [[폴란드]]에서 [[공산주의]]자들을 때려잡는 일을 하고 있었다. 자유군단 자체가 1차 대전 이후 [[실업자]]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퇴역 군인들이 많이 가입했던 단체라는 걸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. 그러나 --[[홍위병]] 같은 삶으로는 --이 자체로는 발전이 없다고 느꼈는지 퀴힐러는 독일로 돌아왔고 바이마르 공화국군의 일원이 되었다. 이후 제1군단의 참모장교로 배속되었고, 국방성 교육부 등 여러 보직을 거쳤으며, 1924년 [[소령]] 진급, 1929년 [[중령]] 진급, 1931년 [[대령]]으로 진급했다. 1차 대전의 베르됭-솜 전투 참전 용사라는 타이틀이 도움이 많이 되었던 모양이다. 다음해인 1932년 10월 [[동프로이센]]에 있는 제1보병사단의 부사단장이 되었다. [[파일:external/s-media-cache-ak0.pinimg.com/588cdbdf4159122cb6222f2de7ded605.jpg|width=400]] 1933년 [[나치당]]과 [[아돌프 히틀러]]가 권력을 잡음에 따라 [[바이마르 공화국]]은 멸망하고 [[나치 독일]]이 수립되었을 때도 퀴힐러는 군에 계속 남아, 1934년 4월 [[소장(계급)|소장]][* 독일군의 계급 체계에는 [[준장]]이 없어 소장이 [[장성급 장교|장관급 장교]]의 첫 단계이다.]으로 진급하였다. 1년 뒤 1935년 [[중장]]으로 진급하고, 1937년 4월 1일 포병대장으로 진급하였다. 이때 퀴힐러는 [[리투아니아]]의 메멜란트 지방을 나치 독일로 합병하는 데 기여했다. 이런 식으로 히틀러에게 충성을 바치면서 그는 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고 국방군 내 입지도 높아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